여성들이 갑자기 입고 있던 백색 가운을 벗어던지고 SNS에 인증샷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비키니 인증샷인데요. 이게 대채 무슨 일일까요. 뜬금없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 큰 이유가 있었는데요. 먼저 이 여성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의료계 종사자라는 것이죠.
지난 2019년 12월 그리고 2020년 8월 미국 혈관외과 학회가 발행하는 한 학술지에 이상한 논문이 게재됐습니다. 논문 주제는 '환자가 의사를 선택할 때 해당 의료진의 소셜미디어를 참고하는 것이 좋다'라는 것이었는데요. 논문에는 '의료진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술을 마시거나 불경한 언어를 사용하고 할로윈 코스튬을 하거나 비키니 입은 사진을 공유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적절한 복장'을 개인 SNS에 올리는 의료진은 비전문적일 수 있다고 결론지은 것이죠.
이게 대체 2020년인 지금, 그것도 미국에서 발생한 일이라는게 믿어지시나요. 그러나 논문에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조사한 235명의 레지던트 의사 중 61명이 "전문적이지 않거나 잠재적으로 전문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고 나름 구체적 증거를 댔다고 하네요. 또 논문에는 한 레지던트 의사가 수영복을 입은 사진과 함께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도 첨부했습니다.
자, 과연 미국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혈관외과 뿐만이 아니라 많은 여성 의료계 종업자들이 집단 행동을 취했습니다. 이 학술지 논문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여성 의료계 종업자들이 SNS에 #medbikini(메드비키니)라는 키워드와 함께 단체로 비키니 셀카 올리기 캠페인에 나선 것이죠. 의료진의 복장과 실력은 어떤 상관 관계도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당연합니다. 당연하죠.
한 여성 의사는 자신의 비키니 셀카와 함께 "의사들이 비키니를 입고 술을 마시는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게 전문적이지 못한 일이란다. 그래서 난 둘 다 하고 있어. #medbikini"라고 적었고요. 또 다른 여성 의사는 "의학 분야에 여전히 남아있는 구시대적 차별을 엿볼 수 있는 연구네. 여기 응급차 트라우마에 대한 선도적인 연구 논문 작성을 끝내고 나온 내 사진이야. 의사도 사람이지. #medbikini"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터무니없는 연구와 이를 게재한 학회에 대한 비웃음, 조롱입니다. 메드비키니 캠페인은 계속됐습니다. 아예 비키니 차림으로 진료를 보고 있는 사진도 올라왔는데요. 의사 캔디스 마이어씨는 소셜미디어에 비키니 차림의 진료 사진을 올렸는데요. 이는 그녀가 서핑을 즐기던 하와이 해변에서 한 남성이 보트와 충돌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황급히 후송 조치한 뒤 환자의 목숨을 살렸던 사진입니다. 워낙 시간이 촉박했던지라 비키니 차림으로 진료를 봤던 것이죠. 그녀는 해당 학회에 대해 "이러한 성차별적인 연구가 처음부터 승인될 수 있었다는게 어폐고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했다네요.
사태가 커지자 해당 학회 측은 즉각 사과문을 올렸고 해당 논문도 철회했습니다. 그것도 "의식적이면서 무의식적인 편견이 반영돼 연구 설계 단계부터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한다"고 했다는데요. 네 이 정도 문구면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사진] 인스타그램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