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대한민국 사람 중에 이 멘트 모르시는 분 없죠. 1700만 관객을 모은 감한민 감독, 최민식 주연의 영화 '명량'을 통해서 명량해전의 세세한 전투 과정까지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게 됐는데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였을까요. 국사 전공자들 중에서도 명량해전은 알면 알수록 대단하고, 경이롭게까지 느껴지는 전투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영화에도 안 나왔던 명량해전의 디테일, 단 12척의 배로 133척의 배를 격퇴시킨 그 기적같은 디테일을 추적해봤습니다.
이순신 함대의 전투법을 포기하다
명량해전은 1597년 음력 9월에 발발한 전투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뒤인 정유재란 도중 발발한 전투였죠. 그리고 조선 함대를 모두 잃은 칠천량 해전에서 고작 2달 뒤에 벌어진 전투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그만의 승리 방식이 있었는데요. 일종의 게릴라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일자진, 학익진 등을 쳐서, 먼 거리에서 함포를 발포해 구조 자체가 취약했던 일본의 함대를 무너뜨리는 방법이었죠. 백병전에 강점이 있었던 일본 함대였기에 아예 접근전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큰 효과를 봤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방법으로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명량해전은 이 이순신 함대의 승리 공식을 스스로 버려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고작 12척, 후에 한 척이 추가돼 13척 뿐이었고 상대해야 할 일본 함대는 133척이었기 때문이죠. 사료에 따라 일본 함대는 300척이란 얘기도 있고 5~600척이란 얘기도 있습니다. 아무리 좁은 해협을 전투 장소로 삼았다고 해도 이 정도의 숫적 열세라면 사실상 백병전을 피할 수 없는 것이죠.
또 영화에서는 명량해전 초기 대장선 홀로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다만 학계에서는 다른 배들이 무서워 서 전투를 고의로 피한 게 아니라 대장선 홀로 싸운 것 자체가 처음부터 이순신 장군의 계획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요. 일본 함대를 우선적으로 유인할 타킷이 전략적으로 필요했었다라는 뜻이겠죠. 이게 사실이라면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대장선에 탑승한 조선 수군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덧붙여 대장선이 선봉을 서서 홀로 수백척의 적을 상대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전투가 있었던가요.
# 하필 벽파진에 12척을 정박시킨 이유
만약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전이 아예 발생조차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사실상 조선 해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일본 함대가 아무런 저지없이 서해까지 진출했다면? 역사의 방향은 크게 틀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사실 가능성이 더 컸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고작 12척의 배로 명량을 지켰지만 수백척의 일본 함대는 이를 무시하고 큰 바다로 돌아 서해로 진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순신 장군 입장에서는 어떻해서든 일본 함대를 명량 쪽으로 유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희박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볼 수 있었던 것이죠.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벽파진에 정박시킨 이유가 그것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벽파진이란 장소는 왜군으로부터 고스란히 노출되는 곳입니다. 12척의 배를 벽파진에 세운다는 것은 싸움 전부터 우리의 전력을 상대에게 전부 노출시키는 꼴이 되는 것이죠. 전투에서 전력을 최대한 숨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를 포기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를 명량으로 유인하는 게 이순신 장군에게는, 아니 당시 조선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죠.
과거 이순신 함대에게 철저하게 당했던 일본 해군은 조선 수군이 단 12척의 배 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탐, 손쉽게 정보를 얻게 됩니다. 구루지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도 다카도라로 구성된 일본 함대는 이렇게 '이순신 사냥'에 나서게 됩니다.
#1 vs 133, 이게 가능한 전투인가
사료에 의하면 명량해전은 약 10시간 정도 진행된 걸로 나오는데요. 아침 일찍 전투가 벌어져 저녁까지, 조선 수군 입장에선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자, 영화에서도 나왔지만 전투 초기 이순신 장군 대장선이 홀로 수십척의 일본 함대와 싸우게 되는데요. 다만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 한대가 어떻게, 또 얼마나 이를 버텼는지는 사료에 나오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도 감독의 상상력에 의존해 이 장면을 연출했죠.
다만 이 정도의 추론은 가능한 것 같네요. 당시 이순신 장군의 판옥선을 포위하고 백병전을 치른 일본 함대는 '세키부네'라고 불리는 배입니다. 속도에 강점이 있는 배였고 대신 크기는 좀 작았는데요. 때문에 높이에서 판옥선과 세키부네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키부네에 승선했던 일본군은 사다리를 거의 90도 정도 세운 다음 판옥선에 오르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렇습니다. 일종의 공성전 비슷한 전투 양상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죠. 성 위에서 성 아래의 적군을 상대하기는 그나마 수월합니다. 게다가 울돌목의 거센 물살에 사다리가 틀어져 수많은 일본군은 스스로 바다에 빠졌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이 생기죠. 일본의 주력선, 대장선으로 불리며 판옥선과 그 크기마저 비슷한 안택선은 명량해전 당시 뭘했냐는 것이죠. 사실 일본 함대 입장에서 보면 명량해전을 앞두고 안택선의 숫자를 크게 늘렸었는데요. 5년 전 이순신 함대, 판옥선의 위용에 당했던 일본 수군인지라 정유재란 때는 안택선을 크게 늘려 질적 향상을 꾀했던 것이죠. 명량해전을 앞둔 일본 수군은 압도적인 숫적 우위에서 오는 자신감 뿐 아니라 질적 업그레이드를 통한 자신감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명량해전에서 그들의 자랑인 안택선은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울돌목 남쪽에서 대기하던 안택선은 낮 12시, 명량의 물살이 반대로 바뀌자 난파된 수십척의 세키부네 뱃조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명량의 승리를 위해서는 안택선을 무용지물화 해야한다는 이 계획, 단순히 운이었을까요.
이순신 장군의 용맹함에 감화된 나머지 10여척의 판옥선들이 뒤늦게 명량해전에 합류하게 되는데요. 바뀐 물살과 이들의 함포 세례로 일본 수군은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사료에 따르면 이날 침몰한 일본 함대의 배는 31척입니다. 그러나 전투 불능에 빠진 일본 배는 100척 가까이 될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선봉장이었던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목숨을 잃었고 대장 격이었던 도도 다카도라도 두 팔에 부상을 입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명량해전 직후 조선과 왜군의 움직임은 어땠을까요. 먼저 일본 수군은 전라도를 거쳐 서해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접었습니다.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당시 충청북도, 서해까지 진출했던 일본 육군은 수군의 보급이 끊기자 곧 후퇴를 결정합니다. 이순신 함대는 어땠을까요. 명량해전 직후 혹시 몰라 서해까지 배를 돌렸던 이순신 함대는 서서히 칠천량 해전 패배 직전의 수군 위용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전국에서 지원자들이 몰렸들었다고 하죠. 이순신 장군은 고금도에 본거지를 두고 판옥선 수를 크게 늘리는데 집중합니다. 명량해전이 끝나고 2달이 지나자 이순신 함대는 다시 100여척에 가까운 판옥선을 거느리게 되었죠. 전력적으로도 크게 부족함 없는 함대의 모습까지 되찾는데 성공합니다.
[사진] 영화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