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7월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이하 운크타드)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 폐막 세션. 대한민국의 지위가 그룹 A(아시아·아프리카)에서 B(선진국)로 만장일치 가결됐다. 아시아라는 단순한 지리적 구분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는 여전히 선진국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왔다. 부단한 노력 끝에 이제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추격국가가 아닌 선도국가로서 인정받게 됐다.
운크타드는 유엔 체제 내에서 무역과 개발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국제기구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그룹이 변경된 것은 우리나라 입지를 되돌아본다면 그야말로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 상전벽해(桑田碧海) 상황이 벌어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는 1964년 운크타드 설립 이래 일반 그룹에서 선진국으로의 그룹 변경이 이루어진 최초 사례였다. 한국은 이로써 '사실상의 선진국'이 아닌 '온전한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올해로 우리나라가 유엔(국제연합)에 가입한 지 30주년이 됐다는 점은 이런 기쁨을 배가시켰다.
◇이미 선진국 자질 갖췄던 나라…이번에 공인
뉴질랜드·인도·일본대사 등을 역임했던 이준규 한국외교협회 회장은 이번 운크타드에서의 우리나라 지위 이동에 대해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매우 획기적이고 고무적인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 회장은 "나는 1984년 주유엔대표부에서 해외근무를 시작했는데 그땐 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하기 전이고 나라 형편도 좋지 않아 늘 다른 나라 동향을 살피러 귀동냥을 다니는 게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과거에는 조심스레 안색을 살펴야 했던 나라들과 이제는 동료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한국은 이미 경제, 외교적인 면에서 사실상의 선진국으로 분류돼 왔다. 1995년 세계은행 원조 대상국에서 빠졌고 1996년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자리잡힌 선진국들이 주를 이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2010년에는 OECD 내 개발원조위원회(DAC)에 정식으로 가입하면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전격 변신했다. 2019년 정부는 미래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서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한국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10위(1조5512억 달러)였다. 올해 4월 IMF 세계경제전망(WEO)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1인당 명목 GDP(3만1496 달러)는 주요 7개국(G7)에 속하는 이탈리아(3만1288 달러)를 최초로 넘어서기도 했다. WTO 집계로 살펴보면 우리나라 수출은 지난해 5125억 달러로 세계 7위였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우리나라는 이미 경제적인 면에서 선진국으로 전환이 됐고 이번에 이를 명실상부하게 공인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며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역할이 더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기에 올해 5월에는 환경문제와 녹색경제를 통틀어 의논하는 P4G 정상회의를 2018년 덴마크에 이어 두 번째로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2년 연속 G7 정상회의에 초청받아 신장한 국력을 방증했다.
일련의 일들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외교관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물론 각계각층의 대한민국 국민이 하나 둘 국제사회로 진출해 우리나라를 지속적으로 알린 결과라는 평이다.
대표적으로 현재 가수 방탄소년단(BTS)의 전 세계적 인기,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등 우리나라의 문화적 파급력은 외부의 이견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과거에 비하면 상전벽해…외국인에게도 '살고 싶은 나라'
주일본대사관 정무과장, 주영국대사관공사 겸 총영사 등을 지낸 유의상 전 외교부 국제표기명칭대사는 현직에 있을 당시 날이 지날수록 국력 신장을 느낄 일들이 잦았었다고 전했다.
유 전 대사는 먼저 "당장 1980년대 주 외교업무는 정권을 홍보하는 일이었다. '이러려고 외교관이 됐나' 싶은 생각도 들었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지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동해 수역의 일본해 단독 표기가 아닌 동해·일본해 병기를 위해 뛰었던 국제표기명칭대사였을 당시 "내가 만나고자 했던 나라들이 나를 거절하지 않고 모두 다 만나줬다. 물론 청취가 일의 성사로 꼭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한국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국력이 크긴 컸구나'라는 점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한국을 바라보는 일반 외국인들의 눈도 점차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추세다. 북한 핵을 이고 사는 분단의 나라, "기브미 초콜릿"(Give me, chocolate)으로 대표되는 못사는 나라라는 평가를 넘어 어느새 '살고 싶은 나라'로 나아가고 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던 멕시코 출신 방송인 크리스티안 부르고스는 "한국은 치안이 좋고 대중교통이 편리한데다 와이파이를 통해 모든 정보통신을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등 편의 환경이 좋다"며 "외국인들이 점차 한국에 사는 것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보통신기술(IT)을 바탕으로 한 신뢰성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시스템, 외국인에게도 건강보험제도를 부담없이 제공하는 점 등 한국의 보건·복지시스템을 강점으로 꼽기도 했다.
◇대외원조 늘리고·폭넓은 시각 갖추고·시민의식 함양돼야
외교계 전·현직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선진국 반열에 오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만큼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세계에 대한 경제적 기여를 늘리는 것은 물론 국제문제에 대한 시야 확장 등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준규 회장은 "유엔은 선진국들에 장기적으로 GDP의 0.7%까지 대외원조를 늘리도록 권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 0.15%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우선은 시급히 0.2% 수준으로 늘리고 중기적으로는 DAC 회원국 평균인 0.4%를 목표로 꾸준히 원조액을 늘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초기 경제개발 단계인 1945년부터 약 50년간 우리나라가 지원받은 해외원조 규모는 누적 600억 달러 정도다. 현재까지 우리가 공여한 대외원조액은 100억 달러 가량이다.
유의상 전 대사는 이와 관련 "앞으로는 어떻게 국내외 경제발전을 이끌어갈지 신성장동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세계를 보는 폭넓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았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비확산 전문관 등을 역임한 임갑수 외교부 평화외교기획단장은 "국제사회에서의 이슈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agenda follower), 이슈를 주도해야 하며(agenda setter), 이 점에서 한반도 밖으로 시각을 넓혀 우리에게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에티오피아 내전, 아프리카 기아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주현 전 카자흐스탄 대사는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을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하면 그 기준에 맞춰 국제사회에서 북한이든 미얀마 문제든 정리할 땐 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김원수 전 유엔 사무차장은 국가 지위 상승에 맞춰 우리 사회의 내실을 다지는 일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고속성장해오는 과정에서 나타난 부작용을 시급히 치유해야 한다"며 "경쟁일변도와 편가르기에서 벗어나 다름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노력이 우리 사회 전체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 또한 지난 15일 제76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평화롭고 품격있는 선진국으로의 꿈을 이루자면서 "품격있는 선진국이 되는 첫 출발은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라고 언급했었다.
이원재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소위 제도권에 있는 인사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정치적 품위, 재판의 공정성, 언론의 문제의식 등이 보다 수준 높게 이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