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싫어도 그냥 살고 있죠"
2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개미마을에서 만난 이정수씨(81)는 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에 대해 묻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의 집 벽화는 깨지고 때가 타 어떤 그림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곳에서 60년째 거주 중인 이씨는 "밤에 (벽화를)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며 "아무도 관리를 안해주는데 차라리 다 지워줬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개미마을 벽화들은 관광객 유입을 목적으로 제작됐으나 주민들을 무섭게 하는 '흉물'이 됐다. 관리 미흡으로 깨지고 훼손됐기 때문이다. 일부 주민들은 지저분해진 벽화가 보기 싫어 직접 페인트칠하거나 시멘트를 덧대 지우기도 했다.
마을 주민 이모씨(60대 후반)는 "관광객이 버린 담배꽁초 등 쓰레기와 소음으로 너무 힘들다"며 "관광객의 유입이 주민들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마을 노인회 회장 백모씨(80대)는 "이번 폭우로 비가 새는 집이 많았다"며 "벽화 제작·관리 자금으로 지붕을 교체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관리 안된 벽화 때문에 우범지역으로 퇴화할수도"
개미마을 같은 달동네나 취약계층이 사는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면 관광객들이 유입되면서 범죄 예방 효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관리 안 된 벽화는 방범 효과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지자체나 관리 주체가 전시 행정의 목적으로 신속하게 제작을 만들어 놓고 이후 방치하면 범죄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며 오히려 (관리가 안된) 벽화 때문에 마을이 우범지역의 모습으로 퇴화하면서 범죄가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벽화 관리가 잘 되지 않는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관광객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며 "그렇게 되면 당연히 범죄 예방 효과는 없다"고 했다.
약 70가구가 거주하는 마장동 꽃담 마을의 벽화도 대부분 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다. 벽화를 건드리자 굳은 페인트 가루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꽃담마을 주민들은 "처음 벽화가 제작됐을 때만 해도 예쁘고 마을이 화사해 보였지만 이후 관리를 하지 않아 없느니만 못하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곳에 거주 중인 윤모씨(58)는 "방범 효과가 전혀 없다"며 "밤에 보면 오히려 더 무섭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꽃담마을 통장인 송지준씨는 "벽화로 마을이 우범지대가 되는 것을 피해갈 수도 있다"면서도 "사후관리가 되지 않아 지저분해지고 위험해 보인다"고 말했다.
◇해외 관광객도 실망…종로구 "하반기 정비 예정"
한때 벽화 마을의 성공사례로 꼽혔던 서울 종로구 이화 벽화 마을도 상황은 비슷했다. 관광객을 유인해 마을에 활기를 돌게 했던 벽화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차에 가려 촬영을 할 수도 없었다. 이곳 주민들과 인근 상인들은 "이젠 벽화마을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라고 했다.
카메라를 든 외국인 관광객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 관광객 밀라니씨(20대)는 "드라마 '도깨비'를 보고 이화 벽화 마을 인근 게스트하우스로 숙소를 잡았지만 벽화가 너무 오래 됐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중국인 유학생 정환가씨(20)도 "벽화도 없고, 카페도 문을 닫아서 바로 낙산성곽으로 이동할 예정"이라고 털어놨다.
벽화마을에서 소규모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주민은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니다"면서 "코로나19 이후 외국인 관광객이 조금 있었지만 이젠 발길이 끊겨 잊힌 동네가 됐다"고 말했다.
카페 사장 유모씨(33)도 "옛날에는 버스로 단체 관광이 왔었는데 이제는 상권이 죽었다"며 지자체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종로구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기존 벽화는 하반기에 정비를 시행할 예정"이라면서도 "벽화 지우라고 하는 주민도 많고, 보전을 했으면 좋겠다는 분도 많아 구청에서 임의로 수리나 확대를 하기엔 부담스럽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