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지난 2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씁쓸한 상황을 맞게 됐다. 임기 5년을 통틀어 공들여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종전선언→평화협정 체결→항구적 평화체제)가 내내 추진만 되다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후임 대통령이 선출됐고, 임기 종료일이 40여 일 남은 만큼 현 상황을 개선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북한은 당일 오후 2시34분쯤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동해상으로 ICBM급 장거리 탄도미사일 1발을 발사했다. 2017년 11월 '화성-15형' ICBM을 시험발사한지 4년4개월 만의 일이다. 북한은 25일 해당 ICBM에 대해 신형인 '화성-17형'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북한은 2018년 선언한 핵실험·ICBM 시험발사 유예(모라토리엄)를 깼다. 바꿔 말하면 한미가 설정한 레드라인(red line·임계점)을 넘어섰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비롯해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2018년 4월27일, 5월26일, 9월18~20일) 등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애를 써왔다. 이에 따라 북한의 군사 도발이 줄어들고 북미정상회담까지 성사되는 평화무드가 형성됐다. 모라토리엄은 이러한 평화를 지탱하는 주요축이었다.
이듬해(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한이 다시금 도발의 강도를 올릴 때에도 문재인 정부는 모라토리엄, 즉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북미 중재자 역할로 나서고 국내 여론도 다독였다. 북한도 여러 차례 무력 도발을 하면서도 '선'은 넘지 않았다.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그러나 이번에 결국 그 선을 넘었다. 올해 1월 제8기 제6차 정치국 회의를 열고 모라토리엄 철회를 시사하더니 전날(24일) ICBM 발사를 강행했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이제 국내 여론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북한을 감싸줄 명분이 사라지게 됐다.
문 대통령은 올해 2월 국내외 8개 통신사와의 합동 서면 인터뷰에서 "만약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발사가 '모라토리엄 선언'을 파기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한반도는 순식간에 5년 전의 위기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며 "끈질긴 대화와 외교를 통해 그 같은 위기를 막는 것이야말로 관련국들의 정치 지도자들이 반드시 함께 해내야 할 역할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던 터다.
문 대통령은 곧장 칼을 빼들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대북(對北)대화 만큼 선을 넘는 도발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는 것도 평화의 원칙으로 삼았던 만큼 문 대통령은 당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회의를 주재하고 북측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를 분명히 냈다.
문 대통령은 "오늘(24일)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는 북한이 약속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유예를 파기하는 것으로, 유엔 안보리 결의에 위반될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한반도와 지역, 국제사회에 심각한 위험을 야기하는 것"이라며 "이를 다시 한 번 강력히 규탄한다"고 말했다. 정부 차원의 대북 규탄 성명까지 나왔다.
이날(25일) 제7회 서해수호의 날을 맞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낸 메시지에서도 문 대통령은 "강한 안보를 통한 평화야말로 서해 영웅들에게 보답하는 최선의 길"이라며 북측을 에둘러 질타했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은 남아있는 임기 동안은 물론 임기가 종료된 후에도 북한과의 '대화와 외교의 끈'만은 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전날 NSC 회의에서 "한반도에서 비핵화를 달성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며 "미국을 비롯한 유관국 및 국제사회와 긴밀히 협력하면서 북한을 외교적 길로 조속히 복귀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나아가겠다"고 했다.
앞서 언급된 8개 통신사와의 인터뷰 당시에도 문 대통령은 '임기 내 남북정상회담 성사 가능성 및 회담 성사의 선결 조건'에 대해 "대화 의지가 있다면 대면이든 화상이든 방식은 중요하지 않다"며 "북한이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다"고 했다.
또 "그동안 나와 김 위원장(총비서)이 함께 했던 많은 노력들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한다"며 "그동안 노력했던 것을 최대한 성과로 만들고 대화의 노력이 다음 정부에서 지속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아울러 '퇴임 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위한 방북(訪北) 특사 등의 요청이 온다면 수용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도 "퇴임 후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변함없다"면서도 "질문과 같은 특별한 상황이 생긴다면 그때 가서 판단할 문제"라고 여지를 열어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