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 26일 도쿄 인근 치바현 이치카와시의 한 아파트. 오후 9시 40분 즈음 경찰들이 들이닥칩니다. 범인은 맨발로 부리나케 도망갔고 경찰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원예용 모래로 가득 찬 욕조를 발견합니다. 좁은 베란다에 모래로 가득 찬 욕조가 있다? 수상했던 경찰은 그 모래를 걷어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충격적인 물체를 맞닥뜨리게 되는데요. 전라의 서양 여성 시체가 발견된 것이죠. 그녀의 이름은 린제이 앤 호커. 당시 22살이던 린제이는 영국 리즈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와 랭기지 스쿨에서 영어 강사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날 린제이와 함께 살던 친구들은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치바현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었죠.
◆린제이 앤 호커 살인사건의 전말
이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린제이는 랭기지 스쿨 영어회화 반에서 한 일본 학생을 만나게 되는데요. 이 학생은 린제이에게 1회에 3,500엔을 레슨비로 지불할테니 개인 영어 교습을 해 달라며 청했습니다. 린제이는 이 학생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사건 당일 아침 한 카페에서 만나 영어를 가르쳐줬는데 이 학생이 뜬금없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돈을 갖고 오지 않았다. 레슨비를 줄테니 우리 집으로 잠깐 가줄수 있겠느냐"고 말이죠.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린제이는 너무 착했습니다. 그녀는 범인의 아파트에서 성폭행을 당했고 전라로 욕조에 묶여 범인의 온갖 변태적인 행위를 겪어야 했습니다. 범인에게 호감이 있는 척 하면서 빈 틈을 노렸고 범인이 조는 틈을 타 달아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범인에게 잡히고 맙니다. 몸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범인의 완력을 당해내지 못했죠. 끝내 목 졸려 숨을 거두게 됩니다. 이날 밤 경찰이 자신의 아파트에 들이닥치자 범인은 원예용 모래로 은닉했던 시체를 놔두고 비상 계단을 이용해 맨 발로 도망을 치게 된 것입니다.
범인은 당시 28살의 이치하시 타츠야. 부모가 모두 의사인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백수로 지내며 부모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을 했었다고 하네요. 외국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영어 공부를 하던 중 린제이를 만나게 된 것이죠. 캐리커처 같은 걸 잘 그렸다고 하는데 이걸로 린제이의 호감을 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밖에 린제이 사체를 은닉하려 했던 방법도 그렇고, 또 그가 평소 시체가 등장하는 에로 만화를 유독 좋아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네크로필리아 증세가 있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치하시 타츠야의 3년 도피 생활
자, 어쨌든 도주하긴 했지만 명확한 범인이 있었기에 이 사건은 곧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됐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신창원을 연상시키는 이치하시의 신출귀몰한 도피 생활은 무려 3년 가까이 지속됐습니다. 일본 경찰의 어설픈 초동 수사는 계속해서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고 이 때문에 린제이의 고국인 영국에서도 일본에 대한 반일 감정이 증가했었다고 하네요. 린제이의 부모가 일본 TV 방송까지 출연해 범인을 꼭 검거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죠. 일본 경찰도 현상금 1,000만엔, 당시 환률로 약 1억 6,000만원을 책정했지만 이치하시는 쉽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훗날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 이치하시는 린제이를 살해한 직후 치바현을 비롯해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등을 전전하며 수차례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죠. 특히 오사카에서는 한 건설 회사에 취직했고 1년 넘게 회사 기숙사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주위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나고야 성형 수술 때가 이치하시를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병원 관계자의 신고로 이치하시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이 출동했었지만 이를 눈치 챈 이치하시는 실밥을 푸는 등 수술 이후의 치료를 본인이 직접 시전하면서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때부터인 것 같은데요. 마치 신창원 도피 생활 때 대한민국의 사회 분위기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서도 이치하시 옹호 여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치하시의 도피 생활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2009년 11월 10일 오사카 경찰은 오사카 남항에서 그를 체포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선박회사 직원의 신고로 붙잡히게 된 것이죠. 체포 당시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휴양지 오키나와로 가는 배를 타려고 했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또 마치 신창원 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치하시 체포 당시 그의 사진을 보고, 일본의 2ch 등에서는 그의 팬클럽이 생겨나게 됩니다.
◆살인과 체포 그 이후
유독 일본에서 이런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이치하시 체포 이후 음모론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의견은 무엇이냐 사실 이치하시는 누명을 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린제이가 일했던 랭기지 스쿨은 사실 영어 레슨은 표면적인 것일 뿐 학원의 실체는 성매매를 알선하는 곳이란 주장입니다. 설득력 있는 근거는 당연히 없습니다.
이치하시 체포 당시 그의 가방에는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란 책이 들어있었다는데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고 해야할 듯한데 2009년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됐죠. 이차하시 또한 재판 과정에서 책을 냅니다. 린제이 살해 보다는 도피 생활에 포커스를 맞춘 책이며,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측면에서 출판했다고 하는데 린제이의 부모는 "역겹다"고 했습니다. 당연하죠. 당연합니다. 이차하시는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한국과 달리 일본 법정은 사형 선고에 대해 그리 보수적이지 않은 편인데..네 어쨌든 희대의 살인마, 일본판 신창원 이치하시는 무기징역으로 최종 판결이 났다고 하네요.
[사진] 데일리 미러 캡처, 온라인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