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일본의 '군함도 왜곡'에 강한 유감을 표명하는 내용의 결정문을 채택한 가운데, 일본 정부의 '언론플레이로' 보일 수 있는 일본 매체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어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극우 성향 매체 산케이신문은 23일 외무성 관계자의 말을 인용,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위 위원국들에 로비 활동을 벌였던 사실도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한 외무성 간부는 이 매체에 "'유감 결의'가 채택하게 된 요인은 한국 정부가 유네스코 사무국을 압박한 영향이 강하다"며 "한국이 전문가의 의견을 금과옥조(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겨 아끼고 받들어야 하는 규범)처럼 취급하는 유네스코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밝혔다.
이 매체는 세계유산위가 지난 12일(현지시간) '유감 결정문' 초안을 공개했을 당시에도 섬 주민과 관계자들을 인용해 "유네스코와 함께 한국 측의 로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정부의 대응을 의문시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일본 매체가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고의적으로 여론을 오도하고 있는 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감지되는 대목이라는 평가다.
외교부 당국자는 "우리 정부가 유네스코 측에 로비를 했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라며 "이번 결의문 채택은 피해자의 증언, 국제 모범사례, 국제단체 항의 등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밝혔다.
◇유네스코 이례적 '강한 유감' 표현으로 日에 경고장
세계유산위는 22일(현지시간) 일본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불이행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하고 충실한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을 컨센서스(전원동의)로 채택했다.
특히 결정문에는 "당사국이 관련 결정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데 대해 '강한 유감'(strongly regrets)을 표명한다"는 내용이 담겼는데 세계유산위 결정문에 이러한 표현이 들어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지난 2018년 결정문에는 '강력 촉구(strongly encourage)'라는 표현이 쓰였다.
세계유산위가 '강한 유감'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 배경에는 일본이 본인들의 입으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세계유산위가 일본의 '마이웨이' 행보를 두고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日, 스스로 한 약속 6년간 안 지키고선…"약속 성실히 이행했다"
일본은 '군함도' 등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시설 23곳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됐을 당시인 지난 2015년 7월에만 해도 한국인 강제노역을 인정하며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해석전략에 포함시키겠다고 했다.
사토 쿠니 당시 주유네스코 일본대사는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에서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 강제로 노역했다"고 밝힌 바 있다.
세계유산위는 '각 시설에 전체 역사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전략을 마련하라'고 일본에 권고했고, 일본 측은 Δ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강제노역 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 Δ인포메이션 센터와 같은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해석전략에 포함하겠다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여측이심'(뒷간 갈 때 마음 다르고 올적 마음 다르다)이라 했던가. 일본은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당시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 작년 6월 문을 연 '산업유산정보센터'(도쿄인포메이션센터) 건립 자체만을 가지고 '약속 성실 이행'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
특히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오히려 강제노역을 부정하거나 '한국인에 대한 차별도 없었다' 등의 증언이나 자료를 전시해둔 것이다.
◇日 '꼼수' 밝힌 유네스코 공동조사단…60페이지 보고서 세계유산위 제출
일본 측의 무성의한 태도에 우리 정부는 세계유산위 21개국과 지속적으로 접촉했고 '부당함'을 알아달라며 관심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와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은 지난달 7~9일 도쿄 현지에 1명(독일), 나머지 2명(호주, 벨기에)은 화상으로 실사를 진행했다.
특히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공동조사단이 가동되는 데는 유산 해석 전문가인 서경호 전 서울대 교수와 이현경 한국외대교수의 공이 컸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 매체가 주장하는 로비가 아닌, '세계 유산은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 등 다양한 시각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점을 중심으로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공동조사단을 설득했다.
그러면서 국제모범 사례로 나치 독일이 유대인과 전쟁포로를 강제 노역으로 동원한 졸페라인 탄광 등에 기념비 설치, 피해자 사진 전시 등을 하고 있는 사례를 제시했다.
공동조사단은 우리가 제시하는 문제점을 바탕으로 실사를 실시했고, 이후 총 6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통해 '일본 정부의 조치 불충분·불이행'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산케이신문에 따르면 공동조사단 실사에 동행했던 가토 고코 산업유산정보센터장은 "전문가들은 한일 역사문제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역사 바로 잡아달라' 미국 퇴역군인단체도 참여
아울러 유네스코 측에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 잡아달라'는 요청을 한 것은 한국 뿐만이 아니다.
외교부에 따르면 미 퇴역군인단체인 '전미 바탄·코레기도 방어병 모임'(ADBC)은 최근 유네스코 뿐만 아니라 21개 세계유산위 위원국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들은 편지에 "유네스코 이름으로 징용 문제에 대해서 전혀 얘기를 하지 않고 그리고 전시 자체도 굉장히 내용이 왜곡돼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한편 세계유산위는 이번 결정서 채택을 통해 일본에 Δ각 시설의 전체역사 해석전략 Δ한국인 등 강제노역 이해조치 Δ희생자 추모 조치 Δ국제 모범 사례 Δ당사자간 대화 등과 관련해 이행을 요청했다.
이와 관련 일본은 오는 2023년 제46차 세계유산위에서 검토될 이행경과보고서를 내년 12월 1일까지 제출해야 한다.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