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US 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던 바비 존스(미국)는 러프에서 어드레스(준비)하는 사이 공이 움직이자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음에도 경기위원회에 자진 신고해 1벌타를 받았다. 그는 결국 이 벌타로 인해 연장전에 돌입했고 끝내 준우승에 그쳤다.
존스는 경기 후 자신을 칭송하는 목소리에 대해 "규칙대로 경기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은행에서 강도짓을 하지 않았다고 칭찬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존스의 이같은 신념을 담고 있는 '바비 존스상'을 1955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다.
한국 골프는 어떨까. 선구자 박세리를 시작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에 빛나는 박인비라는 거물을 배출한 여자 골프는 매년 스타 플레이어를 배출할 정도로 기량적으로는 세계레벨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골프 기량 외적인 측면은 아직 갈 길이 멀어보인다. 최근 골프계를 발칵 뒤집은 윤이나(19·하이트진로)의 룰 위반 파문은 성적 지상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한 한국 골프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가 됐다.
윤이나는 지난 25일 자신의 소속사를 통해 지난 6월 한국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오구플레이'를 했다며 사과했다. 그는 당시 15번홀에서 티샷이 빗나가 러프에 빠졌는데 자신의 공이 아닌 다른 공으로 경기를 진행했다. 경기를 진행한 뒤 뒤늦게 이를 알았지만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윤이나가 이를 자진신고한 것은 한 달이 지난 시점인 이달 15일이었다. 이미 주변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의혹이 점점 커지는 양상이 되자 뒤늦게 룰 위반을 시인한 모양새다. 그가 사과문을 발표하고 '경기 잠정 중단'을 선언했음에도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이번 일을 단순히 '모난 선수' 한 명의 일탈로 보기는 어려워보인다. 골프계 전반에 퍼져있던 성적 지상주의와 부정 행위에 대한 타성 등이 이번 사건으로 제대로 드러났다는 지적이 많다.
한 골프 관계자는 "단순히 어떤 한 선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주니어 무대부터 국가대표 선발전까지 어떤 경기에서든 비슷한 일들이 있었고 논란이 반복돼 왔다"면서 "그럴 때마다 쉬쉬하고 문제를 키우지 않는 방향으로 하는 것이 습관이 되다보니 선수나 부모들도 문제의식을 가지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더구나 골프는 심판이 없는 종목이다. 경기 위원은 존재하지만 모든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선수의 양심과 스포츠맨십, 상대 선수에 대한 존중이 곧 심판이 되는 스포츠다.
그러나 한국 골프에서는 이 같은 배경과 골프 정신 등은 뒷전이다. 어렸을 때부터 그저 기능적인 측면에만 매달리며 더 좋은 성적을 내는데만 몰두한다. 매너 있는 경기를 펼치는 것보다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더 좋은 스코어를 기록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학습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대한골프협회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이 터지면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을 강구하기보다는 최대한 일을 키우지 않고 넘기는 것에 몰두했고, 새로운 스타를 만드는 일에만 골몰했다. 부정행위가 발생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가 필요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이번 사건만 봐도 그렇다. 윤이나의 룰 위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한참 전이지만, 대한골프협회는 선수가 자진신고하기 전까지 선제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부정행위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논란도 많지만 선수가 신고한 '오구플레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의지가 있는 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결국 선수와 지도자, 협회까지 골프 문화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절실해 보인다.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박원 JTBC 골프 해설위원은 "당장의 성과에 집착하기 보다는 더 큰 길을 갈 수 있다는 인식을 선수에게 심어주고 소양 교육에 힘써야한다"면서 "이번 사건 하나만 놓고 볼 게 아니라 한국 골프 전체를 봐야한다. 이제는 골프 경기력 선진국이 아니라 골프 문화 선진국이 됐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사진] KLPGA